《 정의 》
연지 · 분 등을 바르고 매만져 얼굴을 곱게 꾸미는 치장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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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설 》
법규상의 의미는 인체를 청결하게 하거나 미화하는 행위이나,
실제로는 아름다운 부분을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하거나 위장하는 수단을 가리킨다.따라서, 화장이라는 낱말은 가화(假化)·가식(假飾)의 의미를 내포한다.본디 화장이라는 낱말은 우리 나라의 고유어가 아니며, 일본으로부터 개화기 이후에 도입된 말이다.
고려시대에 화장이라는 낱말이 쓰인 적이 있기는 하되, 화장(化粧)이 아닌 화장(化裝)이라고 표기하였다.
우리 나라의 고유용어로는 장식(粧飾) 또는 단장(端粧)이 있다.
이 낱말들은 화장품에 의한 피부손질과 아름다움가꾸기·장신구·옷치장 따위를 통틀어 가리키는 것으로
장식은 화려한 것일 때, 단장은 수수한 경우에 주로 사용하는 관습이 있다.
《 화장의 기원 》
화장은 종교·의학·약학·과학 따위와 혼합되어 있었고, 주술수단 또는 신분표시수단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17세기부터 변모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화장이 독립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미개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초현대사회에서마저 화장행위를 또렷하게 구분짓기 어려운 점이 적지않다.
연지곤지본 / 연지
《 역사 》
< 상고시대의 화장 >
단군신화에 의하면, 한민족의 첫 주거지가 단목(檀木:박달나무) 근처라고 하는바,
이는 향나무인 박달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등 향료가 생활과 밀접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향료를 이 당시에 화장재료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또 고조선시대에는 피부미백수단이 강구된 듯하다.
쑥과 마늘은 양념인 동시에 약재이기도 하지만 피부를 희게 하는 미용재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얼마 전까지 민간에서 널리 행하여진 미용처방을 보면,
쑥을 달인 물에 목욕함으로써 피부를 건강하게 함과 아울러 희어지기를 기대하였다.
짓찧은 마늘을 꿀에 섞어 얼굴에 골고루 펴바른 뒤 씻어냄으로써 살갗의 미백효과 외에 잡티·기미·주근깨 등을 제거하도록 노력하였다.
우리나라의 화장 문화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시기부터 백분, 연지, 머릿기름 등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에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인 화랑들도 화장을 했으며,
이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희고 옥 같은 피부를 선호했으며,
피부를 매끈하게 정리한 후에 분을 바르는 화장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화장법은 백분을 바르고 미묵으로 눈썹을 그린 뒤에 입술과 볼에 연지를 바르는 것이 기본이었으며,
신분과 상황에 따라 그 농도를 달리했습니다.
화장품 제조에는 기름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수유, 동백, 아주까리기름은 머릿기름으로 사용되었고,
참깨, 살구씨, 목화씨, 쌀, 보리의 기름은 화장품 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화장품이라는 낱말은 개화기 이후부터 사용된 외래어로,
그 이전에는 지분(脂粉:연지와 백분) 또는 분대(粉黛:백분과 눈썹먹)가 주로 쓰였습니다.
족집게
잔털을 뽑는 작은 기구. 태평양화학 박물관 소장.

<삼국시대의 화장>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화장술과 화장품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남아 있어 전시대보다는 윤곽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화장 경향은 줄곧 엷은 색조의 은은한 화장,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꾸는 미용에 주안을 두었다.
고분벽화 속 인물화를 보면 갸름한 얼굴곡선에 백옥(白玉) 같은 피부, 가늘고 얇은 일자형의 끝이 살짝 둥글려진 눈썹, 가늘고 긴 눈매와 넓은 이마, 홍조 띤 붉은 볼에 연지를 찍었다.
① 고구려고구려 사람들이 공사(公事)로 모일 적에 모두 비단과 금으로 장식하고, 특히 대가나 주부 등의 벼슬아치는 두건을 쓰며 소가는 절풍을 썼다.
또 모두 깨끗한 옷 입기를 좋아하며 밤이면 남녀가 여럿이 모여서 배우놀이와 음악을 즐겼다는 ≪후한서≫의 기록을 근거로 추리하면, 고구려인들은 신분과 직업에 따라 각기 다른 치장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악공(樂工)과 무녀(舞女)가 이마에 연지화장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② 백제: 일본의 옛 문헌인 ≪삼재도회 三才圖會≫에 일본 사람들은 화장할 줄 모르고 화장품도 만들 줄 몰랐으나 백제로부터 화장품의 제조기술과 화장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③ 신라: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사람들의 화장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여인들이 가체(加髢:다리)를 사용하였는데 금은주옥과 오색비단으로 꾸몄다고 한다.

볼과 이마에는 연지, 곤지를 찍고, 눈등에도 색조화장을 한 상태로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어서 벽화 속의 고구려 여인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매력적으로 보인다(한국역사연구회:https://history.zesmu.com/archive/view/3466)

빛의 과학’전에 처음 공개된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주요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 여인상을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 갸름한 얼굴에 입술을 칠하고 볼에 곱게 화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라의 화랑
신라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에서 남성인 화랑들도 여성들 못지않은 화장을 하고, 갖가지 장신구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또한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어 이마와 뺨, 입술에 바르고 백분 외에 산단(백합꽃의 붉은 수술)으로 색분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 통일신라시대의 화장 >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화장과 화장품이 어떻게 변화하였는 지 확연히 구분지을 만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통일 이전에 엷은 화장 위주의 화장경향이 통일 이후에는 다소 화려해진 듯하다.
현재 출토된 화려한 장신구들이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지고 사용된 것들인데 이를 보더라도 신라사람의 치장은 매우 화려하였다. 그런데 신라사람의 치장은 의상·장신구·화장 등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 깨끗하고 양심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자 노력하였다. 영육일치, 곧 심신이 일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의 복식과 화장
< 고려시대의 화장 >
고려시대의 화장과 화장품의 개발은 신라의 화장문화가 전승, 발전된 것이었다.
고려 태조가 신라의 정치·문화 제도와 문화전통을 계승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게다가, 종교 역시 불교를 계속 신봉하였고, 신라 초기에 생성된 미의식인 영육일치사상이 이어졌다.
그 결과 고려의 화장문화는 외형상 사치해졌고, 내면상으로는 탐미주의(耽美主義) 색채가 농후해졌다.
기생이 짙은 화장을 함으로써 직업 여성은 야한 화장, 여염 부녀자는 엷은 색조의 화장이라는 이원화된 고정관념이 생겨났다. 조선 전기 문신 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에서는 당시 화장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목욕의 경우를 보면, 청결관념이 더욱 강조되어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목격하여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기록한 바와 같이, 남녀가 한 개울에서 한데 어울려 목욕하고, 하루에 서너 차례나 목욕할 만큼 깨끗한 신체를 간직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흰 피부로 가꾸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강구되었는데, 전신목욕이 성행하고 부유층에서는 갓난아이 적에 복숭아 꽃물에 목욕시키기도 하였다. 부유층의 여자들은 난탕(蘭湯), 즉 향수에 목욕하기도 하였다.

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1호 문효공과 정경부인 영정 중 정경부인 모습,
안면에 옅은 복숭아꽃 색을 그대로 본 따서 칠하고 입술연지만을 발랐다. ⓒ 문화재청
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8호, 영의정 하연부부 영정 중 하연부인 모습.
하연 부인상은 얼굴에 분을 바른 뒤 볼 전체에 엷게 홍을 펴 발랐고 입술연지를 붉게 하였다. 양 볼과 이마와 턱에 연지를 찍었고, 눈썹을 굵게 그렸으며, 입술에 연지를 발라 홍장을 하고 있다. 이런 화장 형태는 백제 궁녀사(宮女祀)의 영정에서도 볼 수 있다. 평상시에는 볼과 입술에만 연지화장을 하고 혼례 때는 이마 연지(곤지)도 같이 찍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 조선시대의 화장 >
** 계급에 따라 다른 조선시대 화장법
궁중여인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은 담박한 기초화장을 했지만,
기녀들은 고려의 교방화장법을 계승해 화려한 색조화장을 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화장은 진하진 않았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부드럽고 세련됨을 알 수 있다.

《맑고 깨끗한 백옥 같은 피부는 머리카락을 더욱 검게 보이게 해 흑백의 대비가 최상의 조화를 이룬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사치와 퇴폐풍조에 대한 반작용으로 근검·절약이 강조되고, 사치스러운 옷차림과 장신구 화장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린 바 이로 인하여 일반인의 평상시의 치장이 고려시대에 비하여 훨씬 담박하여졌다.
그것은 조선시대 지배층의 생활사상 탓도 있지만, 기생과 궁녀 등 직업여성들이 분대화장한 데 대한 기피관념 때문에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산업구조가 복구되지 못하여 전반적으로 경제적인 곤란을 겪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화장품산업도 많은 타격을 받았다.

임진왜란 직후에, 일본에서 아사노쓰유(朝の露)라는 상표명의 화장수(化粧水)가 발매되었는데, 광고문안의 서두가 “조선의 최신 제법으로 제조된 아사노쓰유 화장수는……”이고 보면,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에서는 고도의 기술로 화장품이 제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장수 외에도 여러 가지 화장품의 수준이 높았을 것이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오히려 여느 산업과 마찬가지로 퇴보하였다.

< 개화기의 화장 >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경제정책이 자가자급경제(自家自給經濟)를 위주로 하여,
제조기술이 진보하였더라도 상품화가 진전되지 못한 예가 많았다.
화장품도 그 중의 한 예였다.
이 때문에 개항 이후 외국의 갖가지 신상품이 유입되자 재래상품들은 시장에서 밀리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외국에서 수입 혹은 밀수입된 화장품들이 재래상품에 비하여 비교가 안 될 만큼 포장이 미려하고
사용법 또한 간편하여 수입되자마자 대환영을 받았다.
개항 이후 초기에는 주로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유입되었으나,
1920년대에는 유럽(주로 프랑스) 방면으로도 확대되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화장품을 보면 주로 크림·백분·비누·향수 등이었다.
이 화장품들은 대량소비되는 것인 동시에,
재래 화장품에 비하여 포장과 품질이 우수하고 사용법이 훨씬 간편하였기 때문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이와 같은 수입화장품의 인기는 우리 나라 화장품 산업화의 촉진제가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선풍적 인기를 끈 화장품 ‘박가분’. 기존 백분보다 두께가 두껍고 은은한 향도 풍겼다.
[사진 부산근현대역사관]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4014
《 풍속과 생활 》
우리 나라의 세시풍속에는 미용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일찍이 미용의 생활화가 행하여진 것이다.
정월 초하루에는 부인 및 소녀가 새옷을 입고 곱게 화장하는 세장(歲粧)을 한다.
하녀들도 이 날에는 세장을 하였는데, 안주인을 대신하여 사돈이나 친척집에 문안을 가야 하였기 때문이다.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동산에 올라 달맞이를 할 때에도 단장을 한다.
달맞이 때 몸가짐이 깨끗하면서도 단정해야만 소원이 이루어지지,
불결하면 오히려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달맞이 때 부녀자들이 단장을 다투어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대보름날에 행하여지는 다리밟기와 놋다리밟기(안동지방) 때에도 단장하는데,
특히 놋다리밟기에서는 공주로 선발된 예쁜 소녀를 단장시켰다.
스페이스씨

삼짇날에 부녀자들이 들놀이할 때 봄 분위기에 맞추어 화사한 화장과 옷차림을 하였고,
단오에는 맵시있게 차리는 단오장(端午粧)을 한다.
또한 8월 한가위에는 흥겨운 분위기에 맞추어 부녀자들이 농장성복(濃粧盛服)하더라도 나무라지 않았다.
전라도 남해안지방에서는 추석날 밤에 곱게 단장하고 강강술래에 참여하였다.
중양절(重陽節)에 가을 산놀이·들놀이 때에도 단장하였다.
이 밖에 검고 윤기 나는 머릿결을 간직하기 위한 민속도 적지 않은데,
정월 상진일(上辰日)에 모발이 길어진다 하여 부녀자들이 반드시 세발하였고 삼짇날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단옷날에는 창포 삶은 물에 세발하였고, 유두일에도 동류수에 세발함으로써 미발(美髮)로 가꾸었다.
또 정월 상해일(上亥日)에 조두를 만들어 얼굴이 희도록 하였다.
《 우리나라 화장의 특징 》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찍이 백색피부를 호상하였고,
미남·미녀를 존숭(尊崇)하는 생활사상을 가진 때문에 아름다움과 청결을 중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삼국시대부터 화장과 화장품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의 화장경향은 줄곧 엷은 색조의 은은한 화장이었다.
까닭은 문화적·경제적 이유 등 여러 가지이지만,
두드러진 원인은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꾸는 미용에 주안을 둔 탓이었고,
전혀 딴판으로 변형시키는 미용을 경멸한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를 야용이라고 하는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도 저항감이 다소 남아 있다.
따라서 이 때문에 깨끗하고 맑은 피부만으로도 훌륭한 미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나들이할 때 반드시 화장을 포함한 정장을 하였다.
이 관습은 고구려시대부터 비롯되었다고 믿어지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공사(公事)에 반드시 비단옷을 입고 금은주옥으로 치레하였다는 것이다.
현재에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집안에서의 평상복과 나들이옷·신발을 따로 장만하며,
외출할 때의 옷차림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다.
또 신분·성별에 따라 옷차림과 장식·화장·두발형이 다른 예는 다른 나라에서도 두드러진 현상이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다.
고려시대부터 기생이 짙은 화장을 함으로써 직업여성은 야한 화장,
여염부녀자는 엷은 색조의 화장으로 이원화하는
고정관념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사고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 현대의 화장 》
현대화장은 모두 잘아실것 같아 짧게~~^^
현대의 화장은 여성의 얼굴을 가꾸는 행위를 넘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성관, 사회상, 미의식 등을 반영하는 문화의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장품 광고는 그 시대 여성들의 미의식과 사고를 가장 민감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장은 피부를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고, 보습 효과를 제공하여 피부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색조화장은 얼굴의 결점을 커버하여 우울이나 열등감을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하여
기분의 변화를 높여주기도 합니다.
1.다양성과 개성
- 개인화된 스타일 / 글로벌화
2. 트렌드와 기술의 발전
- 고급화된 화장품 / 메이크업 도구의 발전
3.사회적 영향과 변화
-자기표현의 수단 / 포용적인 뷰티
4. 사회적 논의와 변화
-자연스러움 추구 / 메이크업과 성별
화장과 관련된 옛날말과 화장재료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분단장(粉丹粧): 얼굴화장을 뜻하는 말
- 지분(脂粉): 연지와 백분을 가리키는 말
- 분대(粉黛): 백분과 눈썹먹을 가리키는 말
- 장렴(粧匲): 화장품과 화장도구 일체를 가리키는 말
- 면약: 현대의 크림과 유사한 화장품으로, 삼한 시대에 겨울철 피부보호를 위해 사용하였던 것이 시초
- 화장유: 현대의 에센스 또는 오일과 같은 기능을 하는 화장품